박예린

의미와 논리, 담론의 체계인 로고스가 구텐베르크 인쇄 문화가 허락한 일정한 공간적 질서 위에 구축될 수 있었던 거라면,1 본문, 여백, 행간, 타이포그래피, 각주와 미주 등의 형식은 단순한 시각적 배치가 아니라, 사유의 방식 자체를 규정해온 지식의 틀이자 에피스테메였다고 할 수 있다.2 곽기쁨의 개인전 《각주의 각주》는 이러한 글쓰기의 제도적 구조, 중심과 주변, 주와 종의 구분을 재배열하는 시도다. 하단에 밀려난 각주, 곁말처럼 붙은 주석, 바깥으로 유배된 미주⏤이들은 본문을 해설하고 보완하는 글쓰기의 도구이자 명료성을 부여하는 시각적 장치이지만, 때로 본문보다도 더 핵심적인 메시지를 품기도 한다. 전시는 이러한 주변부의 언어들을 중심으로 불러온다. 지면의 중심이 아니라, 삼차원 공간의 한복판으로.

《각주의 각주》는 말 그대로 ‘각주’에 대한 각주를 다는 전시다. 본문, 각주 혹은 주석의 역할을 넘나들며 각각의 작업들은 서로 연결된 의미망을 만든다.3 디지털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책 인쇄 문화와 그 잔존물들⏤도서관이라는 물리적 장소, 서지학적 분류 체계로 정리된 서가, 책등을 뽑고 책장을 넘기는 손끝의 감각, 이 모든 맥락이 의미망 속에서 교차한다. 관람객은 바닥면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Ctrl+n그리고n〉에서 시작해 〈쓰기를 읽기〉와 〈주석〉으로 이어지는 전시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리고 숨겨진 텍스트를 긁고, 새기고, 만지고, 응시하는 몸짓을 통해 그것을 발굴하고 독해한다. 이렇게 전시는 문장들을 지면 위 텍스트가 아닌 공간 속 사물로, 하나의 신체적 제스처로 육화시킨다.

‘아래아한글'에서 각주를 추가하는 단축키에서 제목을 따온 〈Ctrl+n그리고n〉은 디지털 편집 환경과 인쇄 문화의 접면을 드러낸다. 여덟 개 문장이 인쇄된 이 벽화는 인쇄 색상 체계의 원색인 CMYK 중 Key (검정색)을 제외한 세 가지 색을 활용하여, 밀도 있는 망점으로 인쇄되어 있다.4 상하좌우로 중첩된 글자들은 그대로는 식별이 어렵고, 디지털 색상 체계인 RGB로 구성된 컬러 아크릴 렌즈를 통해서만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의 글자들로 분리되어 읽힌다.5 관람객은 디지털과 인쇄 문화의 시각적 층위와 두 색상 체계의 미묘한 색차뿐만 아니라, 초점이 흐려지는 시각 조건 속에서 불편한 독해의 장치가 텍스트를 이미지로, 읽기를 시각적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곽기쁨이 탐색하는 ‘글자-그림’ 복합체의 또 다른 형식이기도 하다.

이어서 걸음을 옮기면 맞은편 벽을 따라 걸린 〈쓰기를 읽기〉가 기다린다. 스무 개의 실크스크린 패널에 한 문장씩, 은색 복권 잉크로 인쇄된 본문이 숨겨져 있다. 관람객이 점선의 가이드를 따라 패널을 긁어내야만 은폐된 문장과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은 이미 인쇄된 문장을 ‘발굴’하는 동시에, 그 위를 손으로 다시 ‘새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새기고 긁어내는 행위는 일종의 고대적 필사와도 닮아 있다. 점토나 석판 위에 문자를 남기던 원형적 글쓰기의 제스처가 현대적 재료를 통해 읽기와 쓰기의 교차점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본문은 이처럼 신체의 제스처를 거쳐야만 생성되는 감각적 텍스트가 된다. 손끝을 통해 텍스트에 ‘물리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이 조형적 독해는 보기-쓰기-읽기의 중첩된 행위를 드러내면서 언어와 몸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주석〉은 붉은 기둥 형태의 구조물로, 손의 체온에 반응해 문장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감온안료로 채색되어 있다. 붉은색(朱)은 주의나 경고, 강조의 기호로 기능해 왔으며, 각주의 번호나 밑줄, 교정 기호에도 자주 사용되는 색이다. 닿는 순간 나타나고 읽는 순간 사라지는 이 문장들은 오직 관람객의 접촉으로만 잠시 드러날 뿐이다. 신체의 온도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와 부재를 오가는 이 텍스트는 해석의 자리보다 감각의 자리를 향한다. 한편 주석(註釋)은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보조적으로 풀이하는 장치이지만, 기둥처럼 세워진 이 작업에서는 더 이상 본문을 보완하지 않는다. 파란색 좌대와 함께 놓이며 본문과 긴장 상태를 이루는 붉은 〈주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율적 조형이자, 불완전한 주해로 남는다.

전시의 동선은 의도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경로를 따른다. 관람객은 본문과 각주/미주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멈추고, 되돌아가고, 다시 응시하는 지연의 몸짓을 반복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문장들, 각주보다 읽기 어려운 본문, 시각과 촉각의 경계에 놓인 곁말들. 《각주의 각주》는 그렇게 독해의 질서를 교란하고, 언어와 이미지, 지면과 공간, 감각과 문맥이 겹쳐지는 자리에 머문다.


1.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윤종석 역 (그린비, 2015), 24–25.
2. 미셸 푸코는 특정한 시대의 지식이 형성되는 근본 구조와 규칙을 에피스테메(epistémè)라고 명명했다. 이는 인식론이나 이론 체계뿐만 아니라 한 시대에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조건들의 집합을 뜻한다.
3. 이 서문도 전시에 대한 일종의 각주다.
4. 망점(網點): 스크린에 찍혀 있는 그물코 모양의 점으로, 이 점의 조밀함에 따라 인쇄물의 농담이 달라진다.
5. 애너글리프(Anaglyph): 두 이미지를 서로 다른 색으로 겹쳐 인쇄해, 특정 렌즈나 필터를 통해 바라볼 때 이미지에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점을 찍고,
행을 바꾸시오.

작고 검은 점 주위에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내면 그것은 선으로 연결되고, 선은 면으로 확장되어 공간에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다. 이 장막 속에서 마무리를 위한 점은 시작을 위한 점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영공간에 펼쳐진 검정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감각적으로 인식한 시고, 맵고, 쓴맛의 색으로 전시장 전체에 둘리어 있으며 사각의 검은 벽면을 울리는 쓰기의 소리는 대화를 암시한다.


인류가 최초로 벽에 그려낸 새까만 황소, 말의 갈기, 몇 개의 막대로 표현된 사냥하는 사람은 검은 윤곽선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윤곽선은 광물이나 동식물을 태운 재로 그려졌으며, 이는 검은색이 인류가 기록을 위해 사용한 최초의 색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기록이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기록물은 여전히 검은색으로 쓰이고, 윤곽선 또한 대부분 검은색으로 그려진다. 기록과 기억의 색으로 검은색은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전시 《점을 찍고, 행을 바꾸시오.》의 검은 벽은 이 고대의 기억을 현대적 공간으로 소환하여 인류 최초 기록의 기억을 되살린다. 


검은 장막 아래에는 1758년 억울하게 귀머거리, 벙어리가 된 하인 토랭1과 인류 최초의 기록 도구 갈대 펜의 의인화인 칼라모스2의 대화가 가려져 있다. 두 인물은 ‘검은 점’에 관해 묻고 답하며, 글과 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검은 장막은 감상자의 체온에 의해 잠시 벗겨지며, 감상자는 이곳에서 벽을 더듬어가며 이 두 인물이 주고받은 대화를 발견하게 된다. 본인이 죄인이라 말한 문맹자 토랭은 이십 년 동안 그 자신만의 어조와 말의 리듬을 문서에 담아내었다. 하지만 그가 작성한 글은 구두점도 없고 띄어쓰기도 맞지 않아 읽기 어려운 소리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칼라모스는 그리스어로 ‘갈대’를 의미한다. 이 갈대는 인류 최초의 필기구인 ‘갈대 펜’을 상징하며 기록과 언어를 탐구하는 존재이다. 토랭과 칼라모스의 대화는 고립된 언어로 쓰인 일종의 리듬 악보와 같으며, 문장은 발음됨으로써 그 뜻을 되찾는다. 칼라모스와 토랭의 대화는 소리 냄으로써 완성되는 언어의 리듬이자 고독한 대화이다.


이들의 대화는 글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매끄러운 독해가 불가능한 문자로 적혀있으며 문장을 천천히 입안에 머금어 발음으로 뱉어내야 그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난독의 문장들은 발음 법칙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소리 나는 대로 자모를 변형하고 혼합해 토랭이 20년 동안 작성한 고백의 문서처럼 작성하였다. 


보기 위한 글은 듣기 위한, 소리내기 위한 글이 된다. 토랭과 칼라모스의 대화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글을 더듬어 드러내야하고, 이는 보는 사람에게 읽기를 요구한다. 기록된 글은 타자기와 만년필의 쓰기 소리로 재현되어 공간에 나즈막히 울린다. 대화를 따라가기 위해 감상자는 신체의 감각을 확대해 듣고 말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시각은 부차적인 감각으로 뒤로 밀려난다.


글로 쓰여 있으나 한 번에 읽어낼 수 없고 검게 가려져 있다. 이 대화를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벽을 더듬고 발음해야 한다. 이처럼 토랭과 칼라모스의 대화는 벽을 손끝으로 더듬고 입으로 중얼거려 문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유도한다. 감상자는 체온을 통해 장막 아래 숨겨진 글자들을 발굴하지만, 이 글자들은 곧 사라지며 다시 망각 속으로 돌아간다. 온전히 시각 만으로 읽을 수 없는 글은 감상자의 신체를 통해 되살아나며 ‘읽을 수 없는 글’로 완성된다. 


잊힌 것이 되살아나는 과정을 통해 글은 읽히고, 이내 다시 사라진다. 그러나 검은 장막 속에서 한때 드러났던 문장들은 감상자의 기억에 새겨지며, 그 순간을 위한 대화가 된다. 감상자는 검은 장막에 둘러싸여 체온 나누어 글을 더듬고 언어를 찾아내어 그것을 입 밖으로 뱉어내어 완전한 언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언어가 단순한 시각적 텍스트를 넘어, 감각과 기억을 자극하는 신체적 경험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1. 토랭 Thorin
1758년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자 다미앵이 처형당하고 난 1년뒤 이야기이다. 
하인으로 일하던 토랭Thorin이라는 남자는 안주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Jeanne-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rdour, duchesse de Menars / Mardame de Pompadour)이 죽자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한밤에 초췌한 얼굴로 일어난 토랭에게는 안주인의 모습이 보였고, 자기에게 어떤 비밀 임무와 함께 금식기도를 지시하는 안주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토랭이 보고 들은 것을 동료 하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토랭은 자기가 정말로 “보고 들었다”고 말했고,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었다. 1758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인생이 급변한 그날 밤 이후로 토랭은 판사들, 주교들, 의사들이 문서의 형태로 행하는 일련의 심문에 문서의 형태로 답변하기 시작했다. 토랭 사건이 중요해진 것은 토랭이 비밀을 털어놓으면서였다. 안주인이 자기에게 왕을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자기가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라는 것이었다. 사건은 20년이 흘러도 끝나지 않았고, 그동안 계속 바스티유에 갇혀 있던 토랭은 결국 완전히 미쳐버렸다. 이야기는 길 뿐 아니라 해독하기도 힘들다. 토랭이 그 20년간 작성한 문서는 수백 장에 이르는데, 그것들을 다 해독하려면 글이라기 보다 말이라고 생각해야한다. 토랭은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종이에 옮겼다. 게다가 단어 단위로 옮긴 것이 아니라 어절 단위, 생각 단위로 옮겼다. 구두점은 당연히 없고, 띄어쓰기는 철자법에 맞지 않는다. 뜻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글, 읽기 힘든 것을 넘어 아예 읽을 수 없는 글이다. 눈은 전혀 쓸모가 없다.
『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Arlette Farge, 김정아 옮김, 문학과 지성사 77p
2. 칼라모스Calamus
칼라모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갈대’를 뜻하며, 글을쓰는데 사용된 초기 도구 중 하나이다. 전시에서는 갈대펜을 의인화한 상징적 존재로 등장하며, 기록과 언어의 기원을 탐구하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칼라모스는 프리기아 지방의 강의 신 마이안드로스의 아들이며 그는 서풍 제피로스와 계절의 여신 호라이 자매 중 하나인 클로리스 사이의 아들인 아름다운 청년 카르포스를 사랑했다. 어느날 칼라모스와 카르포스가 마이안드로스 강에서 수영시합을 하던 중 카르포스는 물에 빠져 죽는다. 칼라모스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하염없이 슬퍼하다가 몸이 말라서 갈대가 되었다, 강변에 바람이 불 때 갈대에서 나는 소리는 카르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칼라모스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내장을 바라보는자
HARUSPEX

인간은 테두리가 깔쭉깔쭉한 세계의 파편들을 통해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물리적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 왔다. 문자가 고안되기 전에 이 과정은 신화의 형태를 띠었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자그마한 비정형의 청동 조각은 낯선 형상으로 미지의 상황들을 굽이굽이 저장하고 있다. 신화의 일부가 담겨 있는 이 조각에 포함된 문장을 읽어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하루스펙스(Haruspex) 뿐이다.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자에게 미래를 점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들은 지배자 곁에서 나라의 대소사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내장을 뜻하는 ‘하루(Haru)’와 바라보는 자를 뜻하는 ‘스펙스(Spex)’의 합성어인 하루스펙스(haruspex)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신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피아첸차의 간을 사용했다. 산양의 간을 본뜬 청동판에는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은 이 간을 통해 신의 의지를 읽어내고 미래를 예측했다. 이 주구는 말을 짓는 하나의 도구이자 상징물이다. 


현대인들도 이 차가운 미지의 돌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읽어낼 수 있을까. 이번 작업은 이 청동 간으로부터 시작한다. 고대인들의 예언은 ‘알 수 없음’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도피처이다. 인간에게 낯선 것, 이방인, 나그네와 같은 ‘알 수 없음’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끌어내린 후, 기원을 담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형상에서 기인한 텍스트는 상황과 미래를 예측하는 수단이었다. 피아첸차의 간에서 발생한 예언의 말들은 선택된 자들에 의해만 구체화되었다. 


하루스펙스는 특정한 하나의 형상과 그 형상에 부합하는 신의 이름만으로 추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언어로 구체화한다. 고착된 형태로 실체의 세계로 끌어내려진 예언의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접목할 수 있는 상황과 결합하여 이해 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변화한다.  





불확정적인 형태, 곧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뽑혀 언어의 형태로 변환된 이 예언은 보고 싶은 상황을 묘사한다.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들로 나타나며 이것을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존재, 하루스펙스가 이것을 정제된 문장으로 표출한다. 이들이 ‘읽어낸 것’ 또는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어떻게 그것들을 언어로 구현한 것일까? 이 작업은 하루스펙스에 대한 이러한 상상으로부터 출발했다. 


 글자를 가시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글자가 달라붙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전시 < 내장을 바라보는 자 Haruspex > 가 펼쳐질 오분의일 공간은 내장을 바라보는 자의 예언을 펼쳐내는 하나의 공간이 된다. 공간에 펼쳐둔 형상들은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읽히지 못하고 그저 그곳에서 우연히 결합되어 불확정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관객의 시선에 포착된 임의적인 의미는 또 다른 관객에 의해 해체되고 또 다른 형태와 의미로 빠르게 변화된다. 이 변화의 시작은 그것을 감각하고 읽고자 하는 당신으로 부터 시작한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를 보완하며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점성술에 사용된 도구는 하나의 이미지로 예언의 언어를 지어낸다. 상징물이 적힌 돌은 날씨를 예측하고, 기원을 담고 또 삶의 지표가 된다. 이미지로부터 뽑아낸 언어들은 다시 기록을 통해 영속성을 갖는다. 실체하는 무언가로 고정된 사고는 언어로 표출되며 이 언어가 다시 현실에 고착되며, 감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내장을 바라보는 자 >에서는 고대 하루스펙스의 예언의 행위를 추측하여시각적으로 재해석한다.  


제시된 설치물들은 홀수의 기둥과 가둬둘 수 없는 성질의 물질들을 사용하여 구성하였고, 언어들은 이 물질 표면을 떠다니거나 스며들어 물체를 유영한다. 이것을 온전히 감각하기 위해서는 감상자의 능동적인 추적 행위가 필요하다. 감상자는 본인의 체온을 작품에 나누어 작품 속에 감춰진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순간의 드러남은 곧 다시 감춰지며, 형상을 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