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걸음을 옮기면 맞은편 벽을 따라 걸린 〈쓰기를 읽기〉가 기다린다. 스무 개의 실크스크린 패널에 한 문장씩, 은색 복권 잉크로 인쇄된 본문이 숨겨져 있다. 관람객이 점선의 가이드를 따라 패널을 긁어내야만 은폐된 문장과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은 이미 인쇄된 문장을 ‘발굴’하는 동시에, 그 위를 손으로 다시 ‘새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새기고 긁어내는 행위는 일종의 고대적 필사와도 닮아 있다. 점토나 석판 위에 문자를 남기던 원형적 글쓰기의 제스처가 현대적 재료를 통해 읽기와 쓰기의 교차점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본문은 이처럼 신체의 제스처를 거쳐야만 생성되는 감각적 텍스트가 된다. 손끝을 통해 텍스트에 ‘물리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이 조형적 독해는 보기-쓰기-읽기의 중첩된 행위를 드러내면서 언어와 몸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주석〉은 붉은 기둥 형태의 구조물로, 손의 체온에 반응해 문장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감온안료로 채색되어 있다. 붉은색(朱)은 주의나 경고, 강조의 기호로 기능해 왔으며, 각주의 번호나 밑줄, 교정 기호에도 자주 사용되는 색이다. 닿는 순간 나타나고 읽는 순간 사라지는 이 문장들은 오직 관람객의 접촉으로만 잠시 드러날 뿐이다. 신체의 온도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와 부재를 오가는 이 텍스트는 해석의 자리보다 감각의 자리를 향한다. 한편 주석(註釋)은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보조적으로 풀이하는 장치이지만, 기둥처럼 세워진 이 작업에서는 더 이상 본문을 보완하지 않는다. 파란색 좌대와 함께 놓이며 본문과 긴장 상태를 이루는 붉은 〈주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율적 조형이자, 불완전한 주해로 남는다.
전시의 동선은 의도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경로를 따른다. 관람객은 본문과 각주/미주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멈추고, 되돌아가고, 다시 응시하는 지연의 몸짓을 반복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문장들, 각주보다 읽기 어려운 본문, 시각과 촉각의 경계에 놓인 곁말들. 《각주의 각주》는 그렇게 독해의 질서를 교란하고, 언어와 이미지, 지면과 공간, 감각과 문맥이 겹쳐지는 자리에 머문다.
1.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윤종석 역 (그린비, 2015), 24–25.
2. 미셸 푸코는 특정한 시대의 지식이 형성되는 근본 구조와 규칙을 에피스테메(epistémè)라고 명명했다. 이는 인식론이나 이론 체계뿐만 아니라 한 시대에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조건들의 집합을 뜻한다.
3. 이 서문도 전시에 대한 일종의 각주다.
4. 망점(網點): 스크린에 찍혀 있는 그물코 모양의 점으로, 이 점의 조밀함에 따라 인쇄물의 농담이 달라진다.
5. 애너글리프(Anaglyph): 두 이미지를 서로 다른 색으로 겹쳐 인쇄해, 특정 렌즈나 필터를 통해 바라볼 때 이미지에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